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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와히드 칼리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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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와히드 칼리파국은 12세기 이븐 투마르트가 시작한 이슬람 개혁 운동에서 비롯되어, 1121년 이븐 투마르트가 마흐디를 자처하며 무라비트 왕조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되었다. 이븐 투마르트 사후 아브드 알무민이 후계자가 되어 마스무다족의 지지를 얻어 칼리파 칭호를 사용했으며, 세력을 확장하여 1147년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그레브 전역을 지배했다. 1195년 아라코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최전성기를 맞았으나,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내분과 기독교 세력의 공세에 밀려 1269년 마린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무와히드 왕조는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건축과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종교적 불관용과 내부 분열로 인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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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와히드 칼리파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모하드 왕조 1147년 - 1269년 (AD)
알모하드 왕조 1147년 - 1269년 (AD)
공식 국명알-무와히둔 (아랍어)
약칭벨벨 제국
한국어 국명무와히드조
역사
건국 시기1130년
멸망 시기1269년
이전 국가무라비트조
계승 국가마린조
성립1130년
하프스조 독립1229년
멸망1269년
정치
정치 체제칼리파국
원수 칭호아미르
주요 지도자아브드 알-무민 (1130년 ~ 1163년)
수도
인구
1150년 추정치5,500,000명
1228년 추정치6,100,000명
면적
1150년 추정치2,300,000 제곱킬로미터
1200년 추정치2,000,000 제곱킬로미터
언어
공용어아랍어, 베르베르어
민족베르베르인, 무어인
종교
주요 종교이슬람교 (알모하드주의)
경제
통화디나르
기타
현재 국가모로코
지도

2. 역사

무와히드 왕조는 베르베르족 마스무다족 출신 이븐 투마르트가 12세기무라비트 왕조의 말리크 학파 이슬람 법학자들을 비판하며 시작한 이슬람 개혁 운동에서 비롯되었다.[1] 1121년, 이븐 투마르트는 고향에서 자신이 구원자(마흐디)라고 선언하고 무라비트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타우히드의 신도"를 의미하는 "무와히드"라고 불렸다.

1147년, 무와히드 칼리파국은 마라케시를 점령하여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켰다.[1][2] 이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의 타이파 국가들을 통합하고, 마그레브 동부까지 진출하여 1159년에는 튀니지(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 거의 전역을 지배했다.[3][4][2] 아부 야쿠브 유수프 1세는 세비야를 사실상 수도로 삼았고, 그의 치하에서 이븐 투파일, 이븐 루슈드와 같은 철학자들이 활약하며 안달루스의 이슬람 문화가 정점에 달했다.[6]

제3대 군주 야쿠브 만수르 시대에 무와히드 왕조는 최성기를 맞이하여, 1195년 아라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를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리비아 서부까지 지배했다. 그러나 점차 종교적 열정이 약화되고, 발레아레스 제도의 마요르카 섬에 있던 무라비트 왕조 후예들의 반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알폰소 8세 등의 십자군에게 패배하면서 안달루스에서의 지배력을 잃었다. 1229년, 타우히드 사상을 포기하면서 왕조의 구심력이 약화되었고,[4] 하프스 왕조가 독립하는 등 판도가 축소되었다.[5] 결국 1269년, 마린 왕조에게 마라케시를 점령당하고 마지막 칼리프 이드리스 와시크가 전사하면서 무와히드 왕조는 멸망했다.

2. 1. 성립 배경

무와히드 왕조는 베르베르족 마스무다족 출신 이븐 투마르트가 시작한 이슬람 개혁 운동에서 비롯되었다.[1] 그는 현재 모로코 남부 아틀라스 산맥 출신으로, 처음에는 마을 모스크에서 글을 배웠고, 이후 마라케시, 코르도바에서 공부했다.[2][3][4][5] 12세기 초에는 동방으로 유학을 떠나 메카 순례를 했다.[2][3][4][5] 그곳에서 무라비트 왕조 치하 마그레브 지역 이슬람교의 개혁 필요성을 느꼈다.[6] 이븐 투마르트는 귀향 후 무라비트 왕조의 말리크 학파 이슬람 법학자들을 비판했다.[7] 1121년에는 고향에서 자신이 구원자(마흐디)라고 선언하고 무라비트 왕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신의 유일성(타우히드)을 강조하는 교리를 설파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타우히드의 신도"를 의미하는 "무와히드"라고 불렸다.

2. 2. 무와히드 왕조의 성립과 발전

1147년 무와히드 칼리파국은 마라케시를 점령하여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켰다.[1][2] 무라비트 왕조 쇠퇴 후, 무슬림(이슬람교도) 영토로 침략해오던 기독교도들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146년 이베리아 반도에 흩어져 있던 소규모 이슬람 국가군(타이파)들의 초청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1147년에 세비야에 입성했다.[1] 점차 안달루스와 마그레브 동부까지 진출하여 지르 왕조와 함마드 왕조를 멸망시켰고, 1159년에는 튀니지(이프리키야)로 진출하여 모로코에서 알제리, 튀니지 남부까지 마그레브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3][4][2]

1150년 살레 맞은편에 안달루스 정복의 전선 기지 리바트를 건설, 도시 계획으로 규모를 확대하여 세비야에 이은 제2의 수도가 될 라바트를 만들었다.[5] 1153년 말라가, 1154년 그라나다, 1157년 알메리아를 함락시켰다.[5] 그러나 무슬림이자 타이파의 일원이었지만 기독교 세력에 협력하는 이븐 마르다니쉬(통칭 로보 왕)에게 가로막혀, 무르시아 · 발렌시아는 정복하지 못했다.[5] 아부 야쿠브 유수프 1세는 1171년 안달루스로 건너가 5년간 머물면서 세비야를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6] 1172년 마르다니쉬가 사망하고, 아들들로부터 유산을 넘겨받으면서 안달루스의 완전한 통일을 달성했다.[6] 카스티야, 포르투갈, 레온으로 원정했지만, 무르시아, 알칸타라, 카세레스 평정 외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 1176년 튀니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모로코로 귀국했다.[6] 1184년 다시 안달루스로 건너간 유수프 1세는 포르투갈의 도시 산타렘을 포위했지만, 여러 악조건이 겹쳐 포위는 중단 및 철수되었고, 유수프 1세도 전상이 원인이 되어 세비야 귀환 도중에 사망했다.[7] 그의 치하에서는 철학자 이븐 투파일과 이븐 루슈드가 활약하여, 안달루스의 이슬람 문화가 정점에 달했다.

제3대 군주 야쿠브 만수르의 시대에 무와히드 왕조는 최성기를 맞이하여, 1190년1191년 두 차례 포르투갈 남부에 침공하여, 실베스 · 파르멜라 · 알카세르 두 살 · 알마다를 빼앗았다. 1195년 아라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를 격파하고, 1196년1197년에도 반복해서 안달루스 정복을 감행하여, 톨레도 · 마드리드 등 안달루스 여러 도시를 침략했다. 레온과 나바라 왕 산초 7세와 동맹을 맺고, 기독교 국가들을 분열시켜 카스티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동쪽에서는 리비아 서부까지 지배하에 두어 무와히드 왕조의 최대 판도를 실현했다.

로마 교황케레스티누스 3세의 화해 공작으로 기독교 국가들은 정전했고, 교황으로부터 파문된 알폰소 9세는 카스티야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1198년 아라곤 왕 페드로 2세와 협력하여 나바라를 침략하여, 1200년에 나바라를 항복시켰다. 점차 왕조의 이념이었던 타우히드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고, 종교적 열정에 지탱된 베르베르인 군대가 약체화되어 갔다. 발레아레스 제도의 마요르카 섬에 있던 무라비트 왕조의 후예 가니야족이 이프리키야에 개입하거나, 함마드 왕조의 잔당도 중앙 마그레브 탈환을 꾀했기 때문에, 만수르는 이러한 반란에 시달렸다.

나시르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이프리키야와 안달루스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1203년 마요르카 섬 정복, 1209년 가르니야족 토벌로 이프리키야는 평정되었다. 그러나 안달루스에서는 기독교 세력의 단결이 진행되어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등이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여 결전을 준비했다. 1211년 징벌 원정을 결의하여 안달루스로 건너가 살바티에라 성을 함락했다. 1212년 봄까지 양측은 결전을 향해 군세를 늘려갔다.

7월 16일, 나시르의 무와히드군은 코르도바 근교에서 알폰소 8세 등의 십자군에게 패배하여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안달루스에서의 지배력을 잃었다.

2. 3. 쇠퇴와 멸망

1226년 코르도바 시민들의 반란으로 바예시는 전사했지만, 카스티야 군의 진출을 막지 못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휴전해야 했다. 1227년 9월 15일, 아부 알 알라는 형에게 반항하여 칼리프를 선언하고 마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 같은 해 10월, 형이 샤이크들에게 암살당하고 야흐야 무타심이 샤이크들에게 칼리프로 옹립되자, 마문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모로코로 건너갔다. 이때 기독교 용병 500명도 데려갔는데, 이는 무와히드 왕조의 종교적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였다.[2]

마그레브에서도 무와히드 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프리키야 총독 압두르 와히드는 반독립적인 자세를 보였고, 베르베르족의 일파인 마린족도 1213년경부터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3]

1229년, 마문은 타우히드 사상을 포기했고, 이는 무와히드 왕조의 구심력을 약화시켰다.[4] 아부 자카리야 1세가 하프스 왕조를 세워 독립하는 등 왕조의 판도는 급속도로 축소되어 모로코 주변만을 지배하게 되었다.[5] 1232년 마문 사후, 압두르 와히드 2세가 무타심을 토벌하고, 아불하산 사이드, 우마르 무르타다가 차례로 군주가 되었지만, 무와히드 왕조는 마린 왕조와 하프스 왕조와의 항쟁에 매달리면서 사실상 안달루스에서 철수해야 했다.[6] 알제리에서도 야그무라산 이븐 자이얀이 자이얀 왕조를 세워 마그레브 지역은 분열되었고, 칼리프는 유력 관료와 군인의 괴뢰로 전락했다.[7] 타이파가 난립하던 안달루스는 기독교 국가에 정복되었고,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왕국 등의 일부 타이파는 카스티야에 신종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1269년, 마린 왕조의 군주 아부 유수프 야쿠브가 마라케시를 정복하고 마지막 칼리프 이드리스 와시크가 전사하면서 무와히드 왕조는 멸망했다. 잔당은 Tinmel|틴멜영어로 도망쳤지만 1276년까지 모두 토벌되었다.

3. 정치와 행정

무와히드 왕조는 경제 발전에 힘쓴 만수르의 노력으로 도시와 지방 모두 번영했다. 관개 공사를 통해 농업 생산량이 늘었고, 각 광산에서 금, 은, 철, 구리가 생산되어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금속 가공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도 발달하여 다양한 상품이 만들어졌다.[1] 항해술과 조선업의 발전으로 교역이 활발해져 이탈리아, 카탈루냐 등에서 온 외국 상인들이 북아프리카로 몰려들었고, 각지에 상관과 도시가 세워져 상업과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무와히드 왕조에서 주조한 금화와 은화는 유럽으로 유통되었고, 세입 증가 또한 발전에 기여했다.[1]

만수르는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건축에도 힘을 쏟아 세비야를 확장하고 정비했으며, 히랄다 탑(후에 세비야 대성당의 일부가 됨)과 라바트의 하산 탑을 건설했다. 또한 철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궁정에 많은 학자를 초빙하여 이븐 투파일과 이븐 루시드가 만수르를 섬기며 저술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븐 루시드는 종교적인 문제로 추방되었다.[2]

4. 군사

무와히드 칼리파국의 군대는 초기에는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 찬 베르베르족 전사들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다양한 민족 출신의 용병들이 늘어나면서 군사적 규율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 군대가 패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 군대는 알폰소 8세가 이끄는 십자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안달루스 지역의 지배력을 잃었다. 이 전투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가 주도하여 나바라, 아라곤, 레온, 카스티야 왕국을 연합시키고 십자군을 결성하여 이루어졌다.

무와히드 칼리파국은 레콩키스타를 추진하는 기독교 세력과 잦은 충돌을 겪었다. 특히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를 크게 진전시켜 무와히드 왕조로부터 많은 도시를 빼앗았다.

무와히드 왕조는 타우히드를 이념으로 삼고 마스무다족을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지만, 점차 아랍인, 베르베르인, 흑인, 투르크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군대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군대의 통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무와히드 왕조의 이념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봉건제를 기반으로 한 기독교 세력과 달리, 이슬람교 세력은 농촌 자치체가 직접 세금을 내는 방식으로 국가와 연결되어 있어 봉건 영주가 없었다. 이는 군사력의 차이로 이어졌고, 무와히드 왕조는 외부 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5. 경제

무와히드 왕조 치하에서 도시와 지방 모두 번영했다. 만수르가 관개 공사를 추진하여 농업 개량과 생산이 향상되었고, 각 광산에서 금, 은, 철, 구리가 산출되어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었다.[1] 금속 가공을 중심으로 수공업 또한 발달하여 상품이 될 제품이 만들어졌다. 항해술, 조선업의 진전으로 교역도 정비되어 이탈리아, 카탈루냐 등에서 온 외국 상인들을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여 각지에 상관과 도시가 세워져 상업,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주조된 금화, 은화가 유럽으로 유통되었고, 세입 증가도 발전의 한 축이 되었다.[2]

6. 사회와 문화

무와히드 왕조는 도시와 지방 모두에서 번영을 누렸다. 만수르는 관개 공사를 추진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여러 광산에서 금, 은, 철, 구리를 생산하여 유례없는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수공업도 금속 가공을 중심으로 발달했다.[1]

항해술과 조선업의 발전으로 이탈리아, 카탈루냐 등지의 외국 상인들이 북아프리카로 몰려들어 상업과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금화와 은화는 유럽으로 유통되었고, 늘어난 세입은 왕조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1][2]

만수르는 세비야를 정비하고 히랄다 탑(세비야 대성당의 일부)과 라바트하산 탑을 건설하는 등 건축 사업에도 힘썼다. 또한 이븐 투파일, 이븐 루슈드 등 학자들을 궁정에 초빙하여 문화 발전을 이끌었으나, 이븐 루슈드는 종교 문제로 배척되기도 했다.[3][1][5]












6. 1. 종교

무와히드 왕조는 이븐 투마르트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종교적 원칙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타우히드를 이념으로 삼고, 말리크 학파 법학자들을 탄압했으며,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등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1]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에 접하면서 점차 종교적 열성이 약화되었다.[2]

야쿠브 만수르는 이븐 루슈드와 관계가 깊었으며, 이븐 투마르트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3] 이드리스 마문은 1229년 타우히드 사상을 포기하는 포고를 발표하여 무와히드 왕조는 더욱 구심력을 잃었다.[4]












6. 2. 학문과 예술

무와히드 왕조 시대에는 الفلسفة والعلوم والأدب والفنar가 발전했다. 무와히드 왕조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여 이슬람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안달루시아는 철학의 황금기를 맞이했는데, 이븐 투파일,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 등 저명한 철학자, 과학자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6. 3. 건축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건축' 섹션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건축' 섹션에 대한 내용은 제공된 소스에서 찾을 수 없어, 작성할 수 없다.

7. 역대 군주

이름재위 기간
아브드 알무민1130년 ~ 1163년
아부 야쿠브 유스프 1세1163년 ~ 1184년
야쿱 알만수르1184년 ~ 1199년
무함마드 나시르1199년 ~ 1213년
유스프 2세1214년 ~ 1224년
압둘 알와히드1224년
압달라 알아딜1224년 ~ 1227년
야흐야1227년 ~ 1235년
이드리스 1세1227년 ~ 1232년
압둘 와히드 라시드1232년 ~ 1242년
아브르 하산 사이드1242년 ~ 1248년
우마르1248년 ~ 1266년
이드리스 2세1266년 ~ 1269년



무와히드 칼리파국 역대 군주 가계도
أبو محمد عبد المؤمن بن علي|아부 무함마드 압드 알무민 이븐 알리ar (1130년 ~ 1163년)
أبو يعقوب يوسف بن عبد المؤمن|아부 야쿠브 유수프 이븐 압드 알무민ar (1163년 ~ 1184년)
أبو يوسف يعقوب بن يوسف المنصور|아부 유수프 야쿠브 이븐 유수프 알만수르ar (1184년 ~ 1199년)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ناصر بن المنصور|아부 압드 알라 무함마드 안나시르 이븐 알만수르ar (1199년 ~ 1213년)
أبو محمد يوسف المستنصر بالله|아부 무함마드 유수프 알무스탄시르 빌라ar (1214년 ~ 1224년)
أبو محمد الواحد المخلوع|아부 무함마드 알와히드 알마흐루ar (1224년)
أبو العلا المأمون إدريس بن المنصور|아부 알아라 알마문 이드리스 이븐 알만수르ar (1224년 ~ 1227년)
أبو زكريا يحيى المعتصم|아부 자카리아 야흐야 알무타심ar (1227년 ~ 1229년)
أبو العلا المأمون إدريس بن المنصور|아부 알아라 알마문 이드리스 이븐 알만수르ar (1229년 ~ 1232년)
أبو محمد الرشيد عبد الواحد بن المأمون|아부 무함마드 아르라시드 압드 알와히드 이븐 알마문ar (1232년 ~ 1242년)
أبو الحسن السعيد علي بن المأمون|아부 알하산 아스사이르 알리 이븐 알마문ar (1242년 ~ 1248년)
أبو حفص المرتضى عمر بن أبي إبراهيم اسحاق بن يوسف بن عبد المؤمن|아부 하프스 알무르타다 우마르 이븐 아비 이브라힘 이샤크 이븐 유수프 이븐 압드 알무민ar (1248년 ~ 1266년)
أبو الدبوس الواثق بالله إدريس بن محمد بن أبي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أبي حفص بن عبد المؤمن|아부 앗다부스 알와시크 빌라 이드리스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아비 압드 알라 무함마드 이븐 아비 하프스 이븐 압드 알무민ar (1266년 ~ 1269년)


8. 평가

무와히드 왕조는 초기에 종교적 열정과 엄격한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며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1229년 마문은 타우히드 사상을 포기하는 포고를 발표했는데, 이는 왕조의 종교적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건국 이념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로, 왕조의 구심력이 약화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칼리프의 권위가 약화되고, 각지의 유력 관료와 군인들이 사실상 칼리프를 꼭두각시로 만들었다.[1] 또한, 마린 왕조와 하프스 왕조 등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여 끊임없이 왕조에 도전하면서, 무와히드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2]

재정복 운동을 추진하던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등 기독교 국가들의 압박도 거세졌다.[3] 무와히드 왕조는 알안달루스에서 사실상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269년 마린 왕조에게 멸망했다.[4]

이러한 무와히드 왕조의 멸망 과정은 외세의 침략과 내부 분열에 맞서 싸웠던 고려 왕조가 몽골의 침략에 저항했던 역사와 유사한 점이 있다.

참조

[1] 웹인용 Qantara https://web.archive.[...] 2013-02-21
[2] 웹인용 Qantara https://web.archive.[...] 2013-02-21
[3] 서적 Le Moyen Âge, XIe- XVe siècle https://books.google[...] Ed. Breal 1994
[4] 문서 마흐디
[5] 문서 1147년부터 "칼리프"라는 이름으로
[6] 저널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http://www.escholars[...] 1997-09
[7] 서적 La frontière entre chrétienté et islam dans la péninsule Ibérique Ed. Publibook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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